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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이 남긴 '타임캡슐', 금석문


우리의 오랜 역사와 정체성을 자랑할 때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배달민족'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유산과 자료가 부족한 실정이다. 이에 고대사 일부는 주변 국가의 역사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일본과 중국에서는 우리 역사를 왜곡하거나 날조하고 심지어 훔쳐가려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고대사를 온전하게 보존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연구와 투자가 필요하다.

 

고대사에서 문서로 남은 사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금석문'은 중요한 1차 사료로 평가된다. 우리나라에는 358점의 국보가 있으며, 그중 13점이 금석문이다. 특히 신라 시대의 비석이 9점으로, 돌은 내구성이 뛰어나 기록으로 남기기에 적합한 소재였다.

 

1988년, 경북 울진에서 농민이 우연히 발견한 봉평리 신라비는 서기 524년에 세워진 것으로, 법흥왕과 지방 귀족들의 회의를 통해 난을 진압한 내용이 담겨 있다. 비석은 후에 국보로 지정되었고, 신라의 관등 체계와 성문법의 존재를 알려주는 중요한 유산이 되었다.

 

1989년, 포항에서 발견된 냉수리 신라비는 503년에 건립된 것으로, 개인 간의 재산 분쟁을 기록한 판결문이다. 이 비석은 신라의 법적 체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2009년 중성리에서 발견된 신라비는 501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개인 간의 재산 분쟁을 다룬 내용이 담겨 있다. 세 개의 비석은 6세기 초 신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마치 고대 신라인들이 후손을 위해 남긴 '타임캡슐'과 같다.